창세기22장1-19절

안녕하세요 설교 공유해드리는데요. 읽어보시고 꼭 필요하다 싶으신 분들만 설교공유해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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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

 

창세기 22:1-19

 

 

하나님의 시험을 성공적으로 통과한 아브라함 이야기입니다. 이 시험을 성공적으로 감당한 아브라함은 놀라운 복을 받습니다. 우리에게도 늘 시험이 주어집니다. 시험 잘 치르는 삶을 삽시다. 아브라함은 어떻게 시험을 치렀는지 살펴봅시다. 그 핵심을 짚어봅시다.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하나님

 

 

1,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셨습니다.

 

그 시험 내용은 감당하기 힘든 것입니다.

 

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불로 태워드리는 것이 번제입니다.

도대체 이것은 무슨 시험일까요?

 

이것은 전적으로 아브라함을 위한 시험입니다.

 

하나님은 시험을 하지도 받지도 않으십니다(1:13).

악의적인 시험을 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성장시키고 우리에게 상주시기 위해 시험을 주십니다.

 

이 시험은 아브라함을 위한 시험입니다. 시험의 이유 하나는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자신의 믿음을 확인시켜주시는 시험이고 다른 하나는 이 시험을 통해 놀라운 복을 주시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릴 것을 아셨지만 아브라함은 자신이 그런 믿음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기에 아브라함 자신이 놀랄만한 믿음이 있음을 이 시험을 통해 깨닫게 되었을 뿐 아니라 시험을 통과한 아브라함에게 큰 복도 주어졌으니 이 시험은 아브라함을 위한 것입니다.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아브라함은 이 시험을 이겼습니다. 이 시험에 합격했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복을 받습니다.

 

어떻게 시험을 이길까요?

 

그가 시험을 이긴 것은 우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가장 빠르게 행동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시험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말씀을 받은 아브라함은 그 다음 날 아침에 일찍 일어났습니다.

 

3,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가장 빠른 시간에 말씀대로 바로 행동합니다.

가장 빠른 순종을 보여줍니다.

 

21:14에도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보내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도 아침에 일찍 일어난 것입니.

 

이것이 아브라함의 순종의 자세입니다.

 

일찍 하는 것이 좋습니다. 해야 할 일이라면 빨리 하십시오. 가능한 시간을 앞당겨 하는 것이 나를 위해서 좋은 것입니다. 시간 끌면 사탄이 시험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시험은 유혹입니다. 나를 넘어뜨리는 것입니다. 사탄이 틈 탈 시간을 주지 말아야 합니다.

시험에서 승리하는 최고의 방법이 빨리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갈등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그만큼 시험에 들고 결국 실패합니다.

하기 싫지만 꼭 해야 하는 일은 빨리 하는 것이 훨씬 좋습니다.

 

결국 아브라함은 빨리 했기 때문에 빨리 행복해졌습니다.

빨리 이삭이 죽지 않고 사는 결과를 볼 수 있었습니다.

길게 끌면서 늦췄으면 고민하고 갈등하는 시간만 길었을 것입니다.

 

또 하나, 아브라함의 시험을 이기는 중요한 원리를 봅니다.

 

이런 상황에서 아브라함은 누구하고도 아무런 말을 나누지 않았습니다. 누구와도 의논하지 않습니다. 이미 말씀이 임하면 그 말씀대로 하면 됩니다.

분명한 말씀이 임했음에도 이런 저런 사람의 의견을 청취하는 것은 말씀대로 하지 않으려는 의도일 뿐입니다.

말씀을 놓고 이렇게 저렇게 생각하고 의논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말씀은 손상을 입습니다.

말씀은 누구와도 타협의 대상일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그의 사랑하는 아내와도 의논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늘 시험을 치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난 행동하고 있습니까?

 

말씀을 읽고 듣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게 됩니다.

문제는 행동입니다. 예배를 어떻게 드려야 하는지를 압니다.

헌금을 어떻게 드려야 하는지를 알게 됩니다.

십일조가 무엇인지 그것을 어떻게 드려야 하는지를 압니다.

인생의 우선순위가 무엇인지도 압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신앙적으로 판단하고 해결하고 운영해야 한다는 것도 압니다.

 

그러면 모두 그 말씀대로 행동하면 됩니다.

그런데 모두가 시험입니다.

자꾸 그 말씀대로 하기 힘들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이런 저런 타협을 합니다. 미룹니다. 의논하지 마십시오.

고민하지도 마십시오. 그냥 행동하면 됩니다.

그것도 가능하면 빨리 하십시오.

고민하고 의논하면 마귀가 틈 탈 뿐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말씀대로 순종하지 못하도록 유혹합니다.

 

 

 

이삭은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달라고 하는데 주저하지 않고 드리는 아브라함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왔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용하고 드리는 것이 최고의 원리입니다.

 

사람들이 받고 나면 내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내려놓지 못합니다.

한 번 받아 내 것이라고 생각하면 다시 드리기 힘듭니다.

내 것이 아니라 내가 관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그대로 따를 때 최고의 관리자입니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

 

가장 사랑하고 귀하게 여기는 그것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내려놓을 수 있는 삶이 최고의 복입니다. ‘이것만은 결코 놓을 수 없다며 붙들고 있는 그것을 내려놓기를 원하십니다.

 

그 어떤 것도 주님보다 귀하지 않다는 것을 고백하기를 원하십니다.

 

 

시험에서 승리한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

 

 

우선 여호와 이레를 봅니다.

 

이삭을 드리려는 마음으로 하나님은 충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마음만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받으실 제물은 하나님께서 준비하셨습니다(13-14).

결국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으로 끝났습니다


4페이지까지 원문입니다. 설교를 참고하시고 싶으신분은 비밀댓글을 달아주세요 교단/이름/이메일



  1. 2018.04.19 06:19

    비밀댓글입니다

    • 2018.04.19 06:38

      비밀댓글입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 마가복음 6:34-44 >

 

34.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35.때가 저물어가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여짜오되 이 곳은 빈 들이요 날도 저물어가니

36.무리를 보내어 두루 촌과 마을로 가서 무엇을 사 먹게 하옵소서

37.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여짜오되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

38.이르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는지 가서 보라 하시니 알아보고 이르되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더이다 하거늘

39.제자들에게 명하사 그 모든 사람으로 떼를 지어 푸른 잔디 위에 앉게 하시니

40.떼로 백 명씩 또는 오십 명씩 앉은지라

 

41.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시고 또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시매

42.다 배불리 먹고

43.남은 떡 조각과 물고기를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44.떡을 먹은 남자는 오천 명이었더라

 

 

 

주님의 쉼을 방해한 사람들에게 주님은 말씀을 가르치시고 이어서 그들을 먹이셨습니다. 이 사건은 사복음서에 모두 기록된 중요한 사건입니다. 오늘은 이 사건을 통해 제자들에게 주신 주님의 명령을 중심으로 은혜 나누기를 바랍니다.

 

 34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주님은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긍휼은 우리 주님의 마음입니다. 죄인도 불쌍히 여기시므로 품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그런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큰 무리는 달려온 사람들입니다.

 

33도보로 그곳에 달려와 그들보다 먼저 갔더라

 

배를 타고 가는 주님을 간절히 바라보고 달려오는 사람들이 주님의 긍휼을 입은 것입니다. 이런 간절함이 우리에게도 있기를 바랍니다. 매일 달려오십시오. 주님의 긍휼히 여기심을 기대하십시오.

 

 

 

보내어 사먹게 하소서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이렇게 불쌍히 여기시며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다 보니 어느새 날이 저물었습니다.

저녁식사 시간이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걱정이 되었습니다.

이대로 있다가는 배고파 돌아가는 길에 지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건의합니다.

 

35,36때가 저물어 가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여짜오되 이곳은 빈들이요 날도 저물어가니 무리를 보내어 두루 촌과 마을로 가서 무엇을 사 먹게 하옵소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드린 말씀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은 달랐습니다.

 

37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제자들은 보내서 사먹게 하자고 했지만 주님은 제자들이 먹이기를 명하셨습니다.

 

44절에 나오는 대로 떡을 먹은 무리가 무려 오천 명입니다. 남자의 숫자만입니다. 이 많은 사람들을 먹일 엄두가 나지 않는 제자들에게 주님의 명령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입니다. 제자들에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의 대답을 보십시오.

 

37우리가 가서 200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

 

우리의 힘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먹으려면 적어도 200데나리온의 돈이 필요한데 우리는 없다는 것입니다.

 

200 데니리온이면 큰돈입니다. 당시 일일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 1데나리온입니다. 1년쯤 심히 쓰지 않고 모아야 200데나리온입니다. 엄청난 돈입니다.

 

그리고 200데나리온이 있다 하더라도 그 떡을 어디서 살 수 있을까요? 떡을 구하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또 구했다 치더라도 그 떡을 어떻데 이곳까지 가져오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제자들에게 요구하셨습니다.

난색을 표하는 제자들에게 또 주님이 하신 말씀이 있었습니다.

 

 

38이르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는지 가서 보라

 

제자들이 파악하고 보고합니다.

 

38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더이다 하거늘

 

제자들이 떡을 세어봤으나 이것으로 무엇인가 할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쥐고 있는 것도 세어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손에 쥐고 있는 작은 것들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무가치하게 보이거나 아직 뭔가 하기에는 부족하다고 여길지도 모릅니다.

난 아직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좀 더 가져야 할 수 있다고 말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것을 가지고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39,40제자들에게 명하사 그 모든 사람으로 떼를 지어 푸른 잔디 위에 앉게 하시니 떼로 백 명씩 또는 오십 명씩 앉은지라

 

주님은 식탁을 차릴 준비를 하셨습니다. 무모하게 보입니다. 그것 가지고 이 많은 사람을 먹일 작정인가 의심스럽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것을 받아들고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제자들에게 주신 후 모든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명하셨습니다(41).

 

어이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놀라운 결과를 보게 됩니다.

 

42-44다 배불리 먹고 남은 떡 조각과 물고기를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떡을 먹은 남자는 오천 명이었더라

 

 많은 사람을 먹이는 자가 됩시다.

 작은 것이지만 주님의 손에 맡기니 큰일이 일어납니다.

오병이어처럼 아무 것도 아닌 무가치하게 보이는 것을 주님의 손에 맡기고

기꺼이 희생할 각오를 하면 주님은 나를 통해서 많은 사람을 배부르게 하고

많은 사람을 환호하게 할 것입니다.

 

문제는 이것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시도조차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움켜준 채 아무런 능력도 맛보지 못합니다.

 

 

요한복음 6장에 의하면 이 오병이어는 어린아이가 가지고 있던 것입니다. 그 아이는 기꺼이 그것을 주님의 손에 맡겼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일을 경험했습니다.

 

이날 떡을 얻어먹은 많은 사람들 중에 어찌 음식을 지닌 사람이 어린 아이 하나뿐이었겠습니까? 그러나 누구도 내 놓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경험할 수 없었습니다. 그 기쁨과 희열을 체험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기꺼이 자신의 배고픔을 해결할 음식을 내놓은 그 아이는 놀라운 기쁨을 누린 것입니다. 그는 평생 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교회를 향해 도와달라고 손 벌리는 사람이 많은 것은 복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재정적으로도 풍성해 져야 합니다. 그것 때문입니다.

화려한 예배당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나 혼자 살기도 벅차다고 생각하며 살면 평생 힘들게 삽니다.

내가 벌어 내 아이들 공부시키고 내 살림만 챙기느라 바쁜 삶이 아닌,

힘들게 살면서도 누군가를 먹이고 주며 사는 사람은 평생 넉넉하게 살 것입니다.

 

 

 

동서남북을 바라보십시오. 우리의 북한을 보십시오. 배고픔과 정치적 소외와 고통을 겪고 있는 우리 이웃을 바라봅시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저들을 보내서 사먹게 하소서라고 말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들이 불쌍하냐?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이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계산합니다. 좀 더 있다가 좀 더 가진 다음에, 내가 아니라 누군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아니라고 여깁니다. 그리고 그들을 먹여달라고 그들을 구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합니다.

 

그 음성에 순종합시다.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은지요? 공부하고 싶은데 돈이 없는 사람, 병들었는데 수술비가 없는 사람, 배고픈데 먹을 것이 없는 사람, 우리 주변에, 북한에, 아프리카에, 눈만 뜨면 보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먹여야 할 사람을 찾읍시다. 내 것을 열어 줄 사람을 찾읍시다.

 

오늘도 우리 때문에 살아나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기를 기도합시다.

 

 

설교를 찾으시는분은 교역자이거나, 성도님들이라고 생각되어집니다. 

참고하시고, 각색하는데만 사용하시길 바랍니다. 



 

 

 

 

믿음으로 사는 길/ 6: 25-34

25.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26.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27.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28.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29.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30.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31.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4.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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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는 하나님을 섬기는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된 사람이 어려운 형편을 대처하는 방법은 세상 사람들이 대처하는 것과는 아무래도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앞을 가로막고 있는 태산이 험하고 높을수록 우리는 큰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강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우리 나라를 사랑하신다고 분명히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한국 교회를 사랑하신다고 믿습니다. 우리 새하늘교회를 통하여 이땅이 회복될 것을 믿습니다. . 많은 사람이 교회를 다니면서도 부패하고 세속주의에 물이 들어 있지만 적어도 이새벽을 깨운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믿습니다.

우리가 바로 회개만 하면 하나님께서 은혜 주실 줄 저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축복을 기대하면서 큰 믿음을 가지고 우리 앞에 있는 문제들을 하나 하나 대처하고 처리해 나가야 합니다.

믿음은 실천입니다. 믿음은 행동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와 같은 큰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반드시 실천에 옮겨야 할 몇 가지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중심으로 해서 두 가지만 제가 여러분에게 함께 말씀 드리면서 은혜

를 나누려고 합니다.

첫째로는, 염려하지 않는 것입니다. 염려를 하지 않는 것이 믿음의 행동입니다. 25절 이하를 보십시오. 예수님은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했습니다.

 

눈만 뜨면 무엇 먹어야 하나, 날이 새면 오늘 무슨 옷을 입어야 하나, 무엇을 몸에 걸치고 나가야 하나를 걱정하는 생활이라고 하면 이것은 완전히 밑바닥 생활입니다. 우리 중에 눈만 뜨면 이런 걸 가지고 걱정할 수밖에 없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바로 이러한 삶을 사셨습니다. 공중에 나는 새도 머리 둘 곳이 있지만 예수님은 머리 둘 곳조차 없는 분이셨습니다. 때가 되면 어디 가서 무엇을 먹을 지 고민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이런 것들로 염려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에게도 똑같은 자세를 요구하십니다. 설사 그러한 궁핍한 상황에 처한다 해도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25절부터 마지막 절까지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을 7번이나 반복하셨습니다.

그게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우리가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까? 염려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염려하는 것이 정상 아닙니까? 당장 생활이 어려운데 어떻게 염려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염려하지 말라고 자꾸 억누르면 오히려 정신적으로 병 날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차라리 염려하고 싶은 대로 실컷 하도록

내버려두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염려하지 말라고 거듭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본문 말씀에서 몇 가지 이유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를 먹이고 입히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한번 생각해 봐라. 먹이고 입히는 분이 누구냐?

지금까지 네가 먹고 살아온 그 모든 과정을 한번 돌이켜 봐라.

누가 먹였느냐? 네가 쌓아놓고 먹었느냐? 누가 마시게 했느냐? 누가 입혔느냐?

네가 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하시지 않았느냐?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먹이고 입히고 오늘까지 돌보아 주신 것이 아니냐?

그런데 왜 하나님의 걱정을 네가 도맡아 하느냐?"

하나님이 하실 걱정을 도맡아 하다니 얼마나 바보스럽냐는 것입니다.

물론 생활 걱정으로 날마다 얼굴을 찌푸리고 계시는 분들 중에는 정말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제가잘압니다. . 당장 직장이 날라가고 내일 어떻게 살지 모르는 그런 상황이 되면 염려를 안할 수 없는 것이 인간적인 심정일 것입니다.

 

가정에서 어린 손자, 손녀가 "아이고 국가 부도를 당했다고 하는데 할아버지, 내일 뭘 먹고살지요? 우리 학교는 어떻게 가지요?"하며 날마다 염려하며 밥도 안 먹고 앉아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웃긴일입니까? 아무리 지금 당장 쓸 게 없어도 //아빠나 할아버지가 보고 가만히 있겠어요? "뭐 이런 애가 있어? 정신 차려. 이 놈아!"하고 타이르지 않겠어요? 당장 그럴 것입니다. 하나님도 우리가 염려하는 것을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정신차려라. 내가 너희를 먹이는 데 네가 왜 도맡아 걱정을 하느냐?"

이스라엘 백성들 수백 만 명이 시내산 광야로 발을 들여놓았습니다. 시내산 광야는 농사도 지을 수 없는 땅입니다. 먹을 것도 없습니다. 사냥도 할 것이 없습니다. 물로 없습니다. 도저히 사람이 살 만한 곳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거기에 수백 만 명을 몰아 넣고 40년 동안 먹이고 마시우고 입히셨습니다. 그 놀라운 하나님을 우리가 아버지로 모시고 사는데, 그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이 어떻게 조금 궁색해졌다고 해서 날마다 걱정하느냐 그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염려하는 자들을 '믿음이 적은 자들'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30절을 다시 한번 읽어봅시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러므로 우리는 걱정을 다 쓸어내는 큰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둘째는, 우리의 염려가 쓸데없는 짓이기 때문입니다. 27절을 보십시오.

27.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10분 염려하면 1밀리미터가 자라고 1시간 하면 1센티미터가 자란다고 하면 저도 걱정을 하겠습니다. 저도 조금 더 컸으면 좋겠거든요. 제딸 하엘이가 키가안커서 재 왜이렇게 안크지 걱정한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3년이 지난 지금 생각하면 괜히 쓸데없는 걱정을 한 꼴이 되었습니다. 너무 잘 자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이 보시기에 걱정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닌데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있으니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셋째는, 염려는 주제 파악을 못한 데서 오기 때문입니다. 34절을 보십시오.

34.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보통 염려라고 하면 미리 앞당겨 놓고 걱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당장 내 앞에 지금 먹을거리가 없어서 염려할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보면 미리 앞당겨 놓고 걱정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내년에 어떻게 살까? 내일은 어떻게 돈을 쓸까? 20년 후에 노년이 되면 어떻게 살까? 별의별 걱정을 당겨 놓고 하는 것이 염려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중에 내일이라는 것이 나의 시간이 되리라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누가 있습니까? 내일이 내 날입니까? 아니요. 하나님이 허락하실 때만 내 날입니다. 하나님이 허락지 아니하면 내일은 내 날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왜 미리 당겨놓고 걱정합니까? 1년 후에 내가 살아 있을지 죽어있을 지 누가 장담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허락하실 때만 내가 1년 후에도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의 생명, 나의 모든 생은 다 그의 손에 있습니다. 죽음과 삶의 열쇠를 하나님이 쥐고 계시는데 괜히 내일 일을 앞 당겨 놓고 제가 잘나서 사는 것처럼 걱정하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가소로운 일이겠습니까?

염려란 이처럼 자기의 주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데서 오는 것이기 때문에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큰 믿음 가진 사람이 실천에 옮겨야 할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는 것입니다. 33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오직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수 있도록 할까, 어떻게 하면 이 세상 사람들이 구원받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주님이 하루라도 빨리 재림하실 수 있도록 우리가 이 땅에서 주님의 마음에 원하는 일을 먼저 할까 하는 것들을 먼저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일을 위해서 어떤 때는 시간을 바칩니다. 이 일을 위해서 어떤 때는 젊음도 송두리째 희생합니다. 이 일을 위해서 어떤 때는 가난과 불편함을 감수하며 우리가 가진 재물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먼저 씁니다. 이것이 바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내 형편에 따라서 주의 나라와 그 일이 좌우되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부자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20절에

있는 말씀대로 보물을 하늘에 쌓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주님이 주신 재물을 기쁨으로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주님이 필요하시다면 내가 덜 써도 주님을 위해서 내 놓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필요하시다면 내가 쓰려고 계획했던 것도 뒤로 미루고 그 일을 앞세워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재물을 쓰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안에 이런 분들이 참 많습니다. 그 동안 교회를 위해서 주님의 복음을 위해서 자기 옷은 아주 값싼 것을 사 입어 가면서 하나님 앞에 헌금하는 귀한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또 일각에서는 자기를 위해서는 풍성하게 쓰지만 주님의 나라를 위해서는 너무나 인색한 분들도 교회 안에 꽤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두려워 떨어야 합니다. 끝까지 그러시면 하나님이 주셨던 물질을 한 순간에 다 빼앗아 가실 지도 모릅니다. 요즘 부도 만나는 사람들 보십시오. 한 순간에 다 날라가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빼앗으면 한순간에 다 없어집니다. 이 사실을 분명히 기억하고 하나님 앞에 두려워 떨면서 하나님이 주신 것을 가지고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궁핍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주님은 궁핍할 때도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라고 말씀합니다. 궁해지면 누구나 생각이 자기 자신에게 집중되게 되기 쉽습니다. 자꾸 생활이 어려워지다 보면 '내 코가 석잔데'하며 자기 걱정만 합니다. 자기 식구 걱정만 합니다. 그 외의 모든 것은 다 2선으로 물러갑니다. 그래서 자기나 자기 식구가 최고의 관심사가 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아무리 황급한 상황이 되어도 믿음을 가진 사람답게 주님의 나라와 그 의를 우선에 두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러면 주님께서 우리의 걱정을 대신 책임져 주시겠다고 말씀합니다.

마귀는 분명 우리 귀에 이렇게 속삭일 것입니다. ', 경제가 어려운데 너 여러 가지 좀 잘 생각해봐. 헌금도 좀 잘 생각해봐. 생활을 낮춘다고 해도 어느 수준까지는 유지해야 될 거 아니냐? 그러기 위해서는 너 지혜롭게 잘 생각해야 돼. 믿음이라는 건 그렇게 맹종하는 것이 아니야.'

그러나 여러분, 사렙다 과부 이야기를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녀는 3

년 반 동안 이스라엘을 강타한 무서운 기근이 어려운 상황 속에서 아들과 함께 곡간에 있는 양식을 아끼면서 근근히 버티다 결국 막바지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겨우 한 끼를 해결할 수 있는 밀가루 조금과 기름 몇 방울밖에 남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것 마저 끊어지면 이제는 어디 가서 손 벌릴 데도 없었습니다. 온 세상이 지금 못 먹어 가지고 허기진 짐승이 되어 있는데 어디 가서 먹을 것 찾겠습니까? 그래서 그녀는 '남은 것 마저 구워 먹고 이젠 죽자'라는 비장한 결심을 하고 불을 피우려고 마른나무 가지를 줍고 있었습니다.

 

그때 엘리야 선지자가 찾아왔습니다. 엘리야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의 집에 있는 통에 그 밀가루 가지고 떡을 만들어서 나에게 먼저 가지고 오라. 만약 나에게 먼저 가지고 와서 나로 먼저 먹게 하면 하나님이 너를 축복하셔서 기근 동안 너의 모자가 굶어 죽지 않도록 하나님이 일용할 양식 주신다고 약속하셨다. 그 밀가루 통에 밀가루가 없어지지 않도록 하나님이 공급하실 것이고, 기름통에 기름이 없어지지 않도록 공급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러니 너는 가서 빵 구워 가지고 내게로 먼저 가지고 오라."

그녀의 입장에서 얼마나 고민이 되었겠습니까? '. 만일 여러분이 그런 상황에 놓여 있다면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놀랍게도 그녀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기로 하고 엘리야에게 그 떡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기근이 다할 때까지 가루 통에는 먹고 나면 또 생기고 먹고 나면 또 생기고 기름통에는 계속 기름이 남아 있는 기가 막힌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이 먹이신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궁핍하고 가난해도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생각하고, 주님의 영광을 위해 필요할 때에는 내가 못 먹어도 드리고, 내가 쓸 것을 못 쓰더라도 우리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해 필요하다면 내놓을 때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하시는 것입니다.

큰 믿음은 우리의 발상을 전환시킵니다. 큰 믿음은 세상 사람처럼 우리가 살지 못하도록 우리의 생각을 바꾸어 놓습니다. 작은 믿음은 세상 사람을 따라가게 만듭니다. 작은 믿음은 이 세상의 물 흐르는 대로 걸어가도록 항상 우리를 던져 놓습니다. 여러분 어느 믿음을 갖겠습니까? 이런 상황에서 적은 믿음을 가지고 신앙 생활하는 사람은 틀림없이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경제가 어려우니까 헌금 좀 줄이자." 아마 몇 달 지나면 헌금이 자꾸 줄어들지도 모릅니다. "기름 값도 많이 올라가는데 기름 아끼기 위해서 매주마다 교회 갈 거 뭐 있냐? 두 주에 한번씩 세 주에 한두 번씩 교회 가자."

"선교는 무슨 선교냐? 때가 어려우니 만큼 선교사를 전부 불러들이도록 해라." 그리고 주일 학교 어린 자녀들을 위해서 꼭 필요한 어떤 일을 하려고 해도 "이 어려운 때 뭐 그런 걸 하느냐? 다음에 사정이 좋아지면 하자" 라며 못하게 막을 것입니다. 또 감사 헌금이 어디 있어요? "이 어려운 때 감사는 무슨 감사냐? 불평을 해도 한이 없는데"라면서 감사 헌금도 안 할 것입니다. 믿음이 작기 때문에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큰 믿음을 가진 사람은 절대 그렇게 행동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려운 때일수록 더욱 주의 마음에 드는 큰 믿음을 가져봅시다. 주님이 우리의 믿음을 저울에 달아보고 정말 흡족해 하시도록 해 봅시다.

우리가 큰 믿음을 가지면 염려를 몰아낼 수 있습니다.

큰 믿음 가지면 아무리 어려워도 주님의 나라를 먼저 앞세우는 하나님의 백성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할 때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하심을 저는 분명히 믿습니다. 우리 이런 큰 믿음 가지고 우리 앞에 있는 이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고 승리하는 아름다운 신앙 생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ㅇㅇㅇ

하나님의 은혜를 요즘은 많이 받습니다. 

그만큼 간절함이 많이도 생긴것 같습니다. 

오늘 설교를 올려 나눔합니다. 

열정만있으면 ...(1:40-45)

 

40한 나병환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41.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42.곧 나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

43.곧 보내시며 엄히 경고하사

44.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서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네가 깨끗하게 되었으니 모세가 명한 것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셨더라

45.그러나 그 사람이 나가서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하니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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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스페인의 한 80대 할머니가 19세기 유명 벽화를 훼손한 사건이 보도되었습니다. 이 할머니가 다니던 성당에는 스페인 화가 마르티네즈에케호모(이 사람을 보라)’라는 벽화가 있었습니다. 이 벽화에는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비스듬히 하늘을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랜 세월을 지나며 그 벽화가 습기 때문에 망가지자, 이 할머니는 안타까운 마음에 직접 붓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정성껏 작품을 복원하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후, ‘마르티네즈의 손녀가 이 작품을 살펴보기 위해 도착했을 때, 그녀는 까무러칠 뻔했습니다.

할아버지 마르티네즈가 그렸던 예수님이 빨간 털 두건을 둘러쓴 기괴한 사람으로 변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마르티네즈의 손녀는 격분했지만, 이 기괴한 작품을 그린 할머니는 오히려 자신은 성당을 아끼고 사랑했을 뿐이라며 당당했습니다.

스페인 문화당국은 이 할머니의 선한 의도는 인정했지만, 복원불능 상태가 되어 버린 작품을 놓고는 심각한 고민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일부에서는 문화재를 무단으로 손상시킨 이 할머니를 처벌해야 한다는 의견도 내놓았습니다.

이 할머니의 근본적인 문제는 무엇일까요?

열정은 넘쳤지만 실력이 부족했다는 점입니다.

열정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실력도 지혜도 없이 열정만 있는 사람은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오히려 더 골치 아픈 문제를 일으키기 십상입니다.

이처럼 이 세상에는 열정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이 많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말씀에도 열정이 넘치는 두 인물이 등장합니다.

한 사람은 예수님이고, 또 다른 한 사람은 예수님께 고침 받은 나병환자였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열정의 결과는 달랐습니다.

예수님의 열정은 복음전파로 이어졌지만, 이 나병환자의 열정은 복음전파의 장애물이 되었습니다.

과연 예수님과 나병환자의 차이점은 무엇이었을까요?

이 말씀을 듣는 여러분들도 열정만 있는 문제의 사람이 아니라,

긍정적인 열매를 맺는 열정의 사람이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1. 기도해야 목표를 잃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각종 병자들을 고치시고, 귀신들린 자들을 고치시자, 예수님은 잠시도 쉴 틈이 없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머무시는 곳에는 항상 병자들이 몰려들어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예수님은 그들을 일일이 고치시느라 밤늦도록 쉴 수가 없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이 정도 시달리고 나면 피곤에 지쳐 뻗어 버립니다.

그리고 늦은 아침이 되도록 깊은 잠에서 깨어날 수가 없습니다.

설사 잠이 깼어도, 좀처럼 일어나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동트기 전, 새벽에 일어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피곤을 느끼시지 않는 철인이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보통 사람들과 동일한 고통과 피곤을 느끼셨지만, 그 새벽에 일어나셨습니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 사람들이 없는 조용한 곳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기도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이 대목을 얼핏 보면 이해가 되기보다 의문만 생깁니다.

예수님도 기도하실 필요가 있으셨을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이미 권세와 능력이 충만하시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그냥 충분히 쉬시고, 느긋하게 일어나셔서 일하시면 되지 않았나?’

충분히 일리 있는 질문들입니다.

하지만 이 질문들은 기도에 대한 오해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기도를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무엇을 얻어내기 위하여 졸라대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물론 기도를 통해 우리의 필요를 하나님께 요청하는 것은 성경적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기도의 본질이나 근본적인 목표는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만나서 대화하는 것, 하나님과 사귀는 것입니다.

만일 어떤 자녀가 용돈이 필요하거나, 자기가 사고 싶은 물건이 있을 때에만 부모님을 찾는다면,

그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좋아질까요?

물론 부모님은 그렇게라도 자녀를 만나는 것이 기쁘겠지만,

자녀는 부모님을 이용하는 것일 뿐, 부모님과 만난다, 대화한다, 사귄다라고 말하기 힘들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무엇을 얻어내기 위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와의 만남 그 자체를 좋아하고 즐기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치 첫사랑에 불붙은 연인들처럼, 자신의 달콤한 휴식과 잠을 포기하면서까지 하나님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애쓰셨습니다.

그만큼 예수님의 마음 속에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열정이 넘쳤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기 위하여 나가신 후, 뒤늦게 잠에서 깨어난 제자들이 예수님을 찾기 위하여 주변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이른 아침부터 병자들과 구경꾼들이 잔뜩 몰려들었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기도하고 계시던 예수님을 찾은 제자들은 다짜고짜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마가복음 1:37).

마치 스타 매니저들이 스타들을 위하여 스케줄을 짜듯,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일정관리를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의외의 반응을 보이셨습니다.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마가복음 1:38).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찾아온 사람들을 의도적으로 피하시고,

갈릴리 지역의 다른 마을들과 회당들을 다니시며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도대체 왜 이러셨을까요?

이런 행동은 예수님의 열성팬들에 대한 실례가 아니었을까요?

이 대목에서 예수님께서는, 40일 동안의 광야 금식기도 중에 사탄의 시험을 물리치신 것처럼, 매우 단호하게 행동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병을 고치고 귀신을 내쫓기 위하여 예수님을 찾았지만, 예수님은 단순히 용한 의사또는 용한 무당이 되기 위하여 오신 분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전도’,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기위함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병 고치고, 귀신을 내쫓는 것은 전도에 따라오는 부수적인 효과이지,

그 자체가 전도의 목표는 아니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결코 잊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구름 떼 같이 많은 사람들이 몰려 왔어도, 예수님은 과감히 그 인기의 유혹을 뿌리치셨습니다.

예수님에게는 당장의 인기보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신에게 맡기신 사명이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토록 굳게 사명의식을 지킬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예수님의 적극적이고 열정적인 기도였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와의 친밀한 만남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정확히 알고 계셨습니다.

 

이처럼 기도하는 사람은 자신의 삶의 목표를 잃지 않습니다.

반대로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의 삶의 목표를 잃고 방황하게 됩니다.

많은 현대인들이 우울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삶의 목표를 잃었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바쁜 일정에 쫓겨 정신 없이 살다가,

어느 날 내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 뼈빠지게 고생하며 정신 없이 살지?’하는 생각이 스치는 순간,

사람들은 말로 다 표현 못할 허무와 좌절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예외는 아닙니다.

기도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뜻과 상관 없이 자신의 뜻과 욕심을 고집하게 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서 봉사하면, 어느 순간 내가 왜 이렇게 고생하고 있지?’하는 생각이 들며 우울해집니다.

기도하지 않으면서 봉사하면, 남들이 자신의 헌신과 노고를 인정해주지 않는다는 서운한 생각이 들며 불평을 터뜨리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기도하지 않아 신앙생활의 목표를 잃어 가는 징후입니다.

그래서 훌륭한 믿음의 선배들은 규칙적으로 기도하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예수님처럼 기도를 통해 분명한 삶의 목표를 붙잡게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2. 순종 없는 열정은 반항이다.

열정적인 전도자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시며 갈릴리 지역을 다니시던 중에, 나병환자 한 명이 다가왔습니다.

과거에는 문둥병’, 그리고 현재에는 한센병이라고 불리는 나병은 전통적으로 천형(天刑)’, 하늘이 내린 벌로 이해되었습니다.

특히 구약성경은 나병환자가 성물은 물론이고, 일반 사람들과 접촉하는 것도 엄격하게 금지하였습니다.

하다못해 나병환자는 가족과도 떨어져 살아야 했습니다.

나병 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고, 외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할 것이요. 병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영 밖에서 살지니라”(레위기 13:45-46).

그런데 이런 나병환자가 당시의 엄격한 종교법을 어기고, 대담하게 예수님께로 다가왔습니다.

자칫 종교지도자들의 눈에 띄면,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나병환자가 예수님 앞에 이르자 갑자기 꿇어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마가복음 1:40).

이 나병환자는 자신의 병이 예수님의 마음에 달렸다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음만 먹으시면, ‘하늘의 벌을 받았다고 손가락질 받는 자신도 고침 받을 수 있다며 부르짖었습니다.

그에게는 예수님이 마지막 희망이었기에, 목숨을 걸고 예수님 앞으로 나아왔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보자 애가 탔습니다.’

그래서 그 나병환자를 직접 어루만지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마가복음 1:41).

이 순간 예수님도 당시의 종교법을 어겼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에게는 율법적 전통을 지키는 것보다 생명을 살리는 것이 급선무였습니다.

예수님의 자비의 말씀이 떨어지자마자, 나병은 깨끗이 떠나갔습니다.

예수님은 고침 받은 나병환자에게, 율법에 따라 정상적인 시민이 되는 절차를 밟으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사건에 대하여 절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함구령을 내렸습니다.

 

예수님께서 함구령을 내리신 이유는 몇 가지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첫째, 이제 나병환자들이 예수님께 몰려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경우의 문제는 당시의 종교법에 따라 나병환자들과 일반인들이 함께 있을 수 없다는 점입니다.

일반인들은 나병환자들에게 떠나라고 요구할 것이고, 나병환자들은 일반인들에게 떠나라고 아우성칠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청중들 사이에 심각한 갈등과 분쟁이 생기게 됩니다.

둘째, 나병환자뿐만 아니라 예수님도 당시의 종교법을 어겼기에, 종교지도자들이 본격적으로 나설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께서 복음을 제대로 전하기도 전에, 종교지도자들과 불필요한 신경전을 벌이며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해야 합니다.

셋째, 나병환자의 소문을 듣고 더 많은 병자들이 예수님께 몰려들면서,

정작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파할 시간을 빼앗기게 됩니다.

이것은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전념하고자, 자신에게 몰려왔던 사람들조차 피했던 예수님의 뜻과도 반대되는 일이었습니다.

결국 나병환자를 고쳤다는 소문이 퍼지면, 여러 가지 이유로 예수님의 전도계획에 심각한 차질이 생깁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불가피하게, 귀신들의 입을 막았듯이, 고침 받은 나병환자에게도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하지만 너무나도 감격한나병환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어기고 이 사실을 동네방네 떠들고 다녔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은 사람들이 많이 모인 마을과 도시에는 더 이상 공개적으로 들어갈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마가복음 1:45).

결국 열정만 있고 순종은 하지 않은 나병환자가 예수님의 전도계획을 심각하게 망가뜨린 것입니다.

 

우리들의 열정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생활에 의해 통제되지 않는 열정은 오히려 불편함을 겪는 일로 변하기 십상입니다.

또한 마음만 뜨거웠지, 말씀과 성령에 의해 다듬어지지 않은 인격은 오히려 모난 돌처럼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 날카로운 상처를 남깁니다.

그래서 순종 없는 열정은 사실상 하나님에 대한 반항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첫째 왕이었던 사울은 남다른 장점과 열정이 있었던 왕이었습니다.

하지만 왕이 되어 교만해지자, 하나님의 말씀을 순순히 따르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나님은 사울 왕에게 아말렉 족속을 치되, 사람이나 가축을 모두 죽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하지만 사울 왕은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상품 가치가 높은 가축들은 남기고, 쓸모 없는 가축들만 죽였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사무엘 선지자가 사울 왕에게 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느냐?’고 따지자,

사울 왕은 좋은 가축들은 하나님께 드릴 제물이라며 핑계를 대었습니다.

그러자 사무엘 선지자는 이렇게 책망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사무엘상 15:22-23).

즉 사무엘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좋은 제물보다도 낫고, 그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은 우상숭배와 다를 바가 없다고 못 박아 말했습니다.

결국 사울 왕은 하나님에게 버림 받고 말았습니다.

현대인들은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듣기 싫어합니다.

더욱이 과거의 권위주의에 대한 반작용으로, 많은 젊은이들은 기존 문화와 질서에 대한 반항을 멋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과거의 악습과 폐단은 철폐되어야 하고, 부당한 권위들은 청산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과거의 것이라고 무조건 다 내다버릴 쓰레기는 아닙니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이 시대가 변해도 잃지 말아야 할 가치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가르치는 영적 지도자들의 정당한 영적 훈육에 대한 순종입니다.

자신의 영적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위반하는 그릇된 가르침과 언행을 일삼는다면 당연히 거부해야 합니다.

하지만 영적 지도자들이 분명한 말씀의 근거를 가지고 여러분을 지도하고 가르칠 때에는,

그 지도자의 연령, 성별, 학식, 배경과는 상관 없이 순종해야 합니다.

출근길 혼잡한 교차로에서 교통경찰의 수신호를 무시하는 차량은 교통혼란을 가중시켜 다른 사람들에게 큰 고통을 줍니다.

교통표지판과 신호등을 무시하는 차량은 대형사고를 일으키게 됩니다.

여러분의 영적 지도자들은 이 심각한 영적 혼돈시기에 여러분을 안전하게 인도할 영적 교통경찰이며, 신호등이며 표지판입니다.

여러분들의 삶에 아름다운 열매들이 맺히도록, 영적 지도자들에게 순종하십시오.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히브리서 13:17).

 

말씀을 마칩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열정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깨닫기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에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한 열정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과 영적 훈육에 순종하는 법을 배우십시오.

기억하십시오. 열정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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